▶ 국민은 개, 돼지, 레밍 망언의 의미.
"국민은 개 돼지" 망언에 이어, "국민은 레밍 같다"라는 말까지 이어진다. 단지 사람을 짐승 등에 비유/비하해서 기분이 나쁜 것일까? 고위 공직자나 선출된 국민/시민의 대표가 하는 '신의측'에 벗어난 망발이라서 거북한 것일까? 정작 위험한 것은 정치/경제적 관료 조직과 그 구성원 속에 자리 잡은 "엘리트론"에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엘리트라고 생각하는 자들의 거만한 눈에는 국민이 '개 돼지, 레밍' 등 어리석은 하등의 무리와 같은 존재로 보이는 것이다.
몇 해 전에 우리 사회의 숨은 위협인 '전체주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이 또한 그 연장선에서 있고 기본적인 사고방식은 거의 같다. 엘리트론은 국가 또는 사회 체제가 일부 '소수자의 지배'에 의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파시즘 등의 전체주의를 정당화하는 논거로 사용되었다. 이런 논란은 1차 세계 대전을 이후 파시즘과 나치즘의 대두로 전 세계적인 문제로 확대되기도 했다.
'깨어있는 시민' 즉, '자각한 시민과 이성적인 대중'을 전제로한전제로 한 현대의 민주주의에 대척점에 있는 것이 엘리트론이다. 대중은 어리석고, 개 돼지 같고, 레밍처럼 몰려다닌다는 존재로 인식하는 자들의 생각은 전체주의적인 성격의 엘리트론에 근거하지 싶다. 이런 엘리트론은 자각한 시민, 이성적인 대중을 전제로 한 의회제 민주주의 체제와 상충하며 때로는 교묘히 그 속에서 공존한다.
최근 엘리트주의는 비대해진 정치/경제 관료조직에서 뿐만 아니라 선거로 선출되는 경우에도 드러난다. 대의 제도의 맹점이라고 할 수 있는 '무기속 위임 관계'에서 오는 느슨한 통제는 엘리트론 자생/침투의 근거가 된다. 국민 또는 시민 유권자들은 일꾼을 뽑았더니 상전 노릇을 하는 스스로를 엘리트로 자각하는 그릇된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그들이 시민의 종복을 자처하며 고개를 조아리는 것은 기망이요 사기일 뿐이다. 현대 민주주의 체제하의 선거 제도는 엄밀하게 따지면 지도자 또는 리더를 선출하는 과정이 아니라, 위임 관계에 기초한 '(국민) 대표'를 뽑는 것이다. 선거철마다 되풀이되는 인재론의 상당 부분은 엘리트(지도자) 론에 근거하고 있어 입맛이 씁쓸했다.
▷ 엘리트(Elite)
마스(mass 대중)와 대립되는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영역에서 정책의 결정, 조직의 지도, 문화의 창조에 참여하는 소수자를 말하며, 그들의 지배·지도를 받는 대중은 수동적 존재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엘리트론이 특별히 주목받게 된 시기는 20세기 초부터 제1차 세계대전 후 나치스가 대두할 때까지의 시기이다. 이 무렵은 국민의 정치참여에 문호를 연 것처럼 보인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정치체제가 현실적으로는 소수자의 지배에 불과하다는 여론이 일어나자, 그러한 상태가 정치세계에서는 피할 수 없는 필연이라는 생각에서, 그 사실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많았다. 그것이 엘리트론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며, 이를 논한 대표적 학자로는 G.모스카, G.J.오르테가, V.H.파레토, R.미헬스 등이 있다.
파레토는 엘리트의 자격은 시대에 따라 변하며, 어떤 때는 남성 또는 여성이, 어떤 때는 고령자가, 어떤 때는 육체적으로 강건한 자가, 또 어떤 때는 지식이나 도덕성이 뛰어난 자가 엘리트가 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인류의 역사는 묵은 엘리트가 몰락하고 새로운 엘리트가 등장하며(엘리트의 周流), 항상 엘리트가 지배한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엘리트론이 사실의 설명에서 나아가 엘리트 정치의 긍정적인 면에 이르면 새로운 문제가 생긴다. 즉 사회형태 여하를 막론하고 소수자가 항상 대중을 지배한다는 설은, 제1차 세계대전 후에 대두한 파시즘이나 나치즘을 직접·간접으로 지원하는 결과가 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이른바 대중사회상황이 강세를 띠고, 또 거대한 정치적·경제적 관료조직이 생김에 따라서, 또다시 엘리트 대 대중의 도식(圖式)이 문제되고 있으며, 특히 대중은 수동적이며, 정치에 대해서 관심이 없다는 생각이 득세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의회제 민주주의는 이성적인 대중 없이는 성립할 수 없다. 또 마르크스주의의 지배계급 대 피지배계급이라는 도식도 피지배계급의 이성에 대한 신뢰를 전제한 것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엘리트 대 대중의 도식과는 성격을 달리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엘리트 [elite] (두산백과)
국민에 의해 탄핵당한 이전 정권과 궤를 같이하던 일부 수구세력의 주장을 떠올려 보자. "뛰어나고 영석한 지도자의 영도력으로 발전한 사회. 그리고 다시 그런 지도자를 기다리는 사회" 이는 영도자로 대표되는 '엘리트주의' 전형이며 역한 전체주의 냄새가 진동하고 있지 않은가!
국내 굴지의 S 재벌 회장이었던 이 某라는 자가 주창했다는 '천재 경영론'이니 '인재경영' 따위의 허섭한 엘리트론 또한 떠오른다. "한 명의 천재가 수십만 명을 먹여 살리는 어쩌고저쩌고..." 이 막 돼먹은 주장에 동조하는 자들도 많았다. 이 사회에 만연한 '인재론' 또한 경계가 모호한 엘리트론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조금만 눈을 돌려도 이 사회에서는 어디서나 그 개념도 모호한 '인재'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있고, 스스로 그런 엘리트 인재가 되기를 희망하고 치열한 경쟁에 뛰어든 사람들로 넘쳐난다.
엘리트주의가 가장 만연하게 용인되는 곳은 기업과 교육계다. 자본의 노예가 된 기업은 차치하더라도 교육, 특히 공교육에 만연한 엘리트론/엘리트 양성론은 위험하다.
▶ 특목고, 자사고 폐지에 얽힌 엘리트 (양성)론과 공교육 문제
교육에서의 엘리트 주의는 너무 쉽게 용인되고 묵인된다. 자본주의 경제/경영 논리와 결합하면서 날개를 달기도 한다. 교육에서의 효율과 경쟁, 그리고 인재 양성과 이를 위한 차등과 평가 그리고 변별력. 이런 논리가 지배하는 교육이 진정한 공교육인가? 공교육의 진정한 목적은 우수한 인재 양성이 아니다.
공교육 - 공적 준거와 절차에 따라 공적 주체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교육
제 도로서의 공교육은 학교 제도로서 구체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교육의 기회균등을 실현하기 위하여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받을 권리’를 보장함으로써 교육 기회의 균등 원칙은 학교 제도 운용의 기본이 되고 있으며, 이 맥락에서 의무교육과 무상교육의 원칙을 제도화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공교육 제도는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단계로 구분되어 있으며, 여기에 평생교육의 영역을 연결하고 있다. 이러한 공교육의 체제는 1997년 교육법제의 개편을 거쳐 헌법과 교육기본법, 초·중등교육법, 고등교육법, 평생교육법을 근간으로 하는 교육 관련 법체계로 제도화되어 있다. 공교육의 제도화란 공교육을 운영하는 원칙과 기준, 절차를 법으로 정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교육 관련 법체계에서는 공교육의 운영에 관한 학교의 종류, 교육기간, 교육목적과 방침, 입학과 졸업의 기준, 교육과정과 교과, 교사, 학교의 설립기준, 학교 운영에 관한 기본사항 등을 규정하고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렇게 교육의 운영에 관한 사항을 공적으로 규정하여 운영하는 교육을 공교육이라고 구분할 수 있다. 따라서 공교육은 정부 조직의 통제와 규제의 대상이 된다. 이로 인하여 교육의 획일화와 행정통제로 인한 규제와 관료적 통제가 문제로 제기되는 경향이 있다.
사교육 - 공교육과 구별되는 사적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교육
개 인의 필요에 의해 이루어지는 사교육은 국가나 공공단체에 의해 이루어지는 공교육과 그 성격이 다르다. 첫째, 공교육은 국가나 사회의 필요에 의해 국민에게 제공되는 교육인 반면, 사교육은 개인적 필요에 의해 스스로 찾아가는 교육이다. 둘째, 사교육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비교적 적게 받는다. 셋째, 공교육은 교육과정과 교육내용의 제약을 받지만 사교육은 비교적 자유스럽다.넷 째, 공교육의 공급자는 최소 자격기준을 충족하고 있기 때문에 비교적 등질적이지만, 사교육의 공급자는 최소 자격기준의 적용을 받지 않기 때문에 공급자 간 질적 편차가 매우 심하다. 다섯째, 공교육은 전인교육이 목적이기 때문에 다양한 교과목을 일정한 기간에 걸쳐 다루지만, 사교육은 특기 신장, 취미활동, 상급학교 입학 등 제한된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소수의 교과목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경우가 많다. 마지막으로 사교육은 공교육에 비하여 교육 부담 비용이 크지만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지며 공교육보다 개인의 선택권이 매우 높다.
[네이버 지식백과] 사교육 [私敎育]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특별한 재능, 소위 천부적인 재능으로 불리는 사람(소위 분야별로 엘리트라고 불릴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에 대해 우리 사회는 특별한 교육의 기회를 제공하여야 하는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고 하여도, 우수한 학생에게 일반 학생들과 구분하여 그들의 수준에 맞는 교육을 받을 구체적인 기회를 제공하여야 하는가? 한걸음 나아가 우수한 학생과 일반적인 학생의 교육과 차별화 하는 것이 진정한 공교육의 목적인가? 공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회균등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시험 성적을 평가하여 상위 5%만 갈 수 있는 학교나 교육 과정이 있다면, 모든 학생이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회가 균등하다고 할 수 있는가. 공교육에서는 형식적인 기회균등히 아니라 실질적인 기회 균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경쟁'과 '효율' 따위의 경제/자본적 용어로 엘리트론을 정당화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더구나 공교육은 자본의 가치나 논리로만 이야기해서는 안 되는 분야이다. 모두에게 공정하고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 과정에서 특별한 재능이 있다면 이를 방해받지 않고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하는 것으로 공교육에서는 충분하다. 특별한 재능에 대해 교육을 받을 자유를 인정하는 것과 사회 공적의 비용으로 특별한 교육의 일부 소수의 사람에게 기회를 제공은 구분되어야 한다. 공적 비용으로 특별한 교육을 소수에게 제공할 때는 사회 전반의 의견 수렴과 동의가 필요하다. 즉, 특수한 목적을 가지는 교육이 정당하려면 그 사회 구성원이 특수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하여 공감하여야 하고 교육의 기회가 실질적으로 모든 교육 대상자에게 균등하여야 한다. 일부 특목고, 외고, 자사고를 만들어 두고 입학하기 위한 좁은 문으로 교육받고자 하는 자를 경쟁으로 내모는 것이 공교육에서 의미하는 진정한 기회균등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학교의 서열화를 가속시키므로 특목고와 자사고는 공교육의 기본 이념에 걸맞지 않고 폐지하는 것이 사회 전체적으로 얻는 이익이 많다. 백번 양보해서 특목고의 교육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면 특목/일반 구분 없이 해당 교육과정을 확대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일부 특목고, 자사고 존치를 주장하는 의견에서는 사립학교 자율성과 교육의 하향 평준화를 보완하는 장점이 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공교육의 목적에 견주어 사립학교 자율성의 보장의 가치는 일부 사학의 염원에 불과하며, 사립의 자율성 보장으로 얻을 수 있는 사회적 실익 조차 불명확하다. 그리고 일정 수준의 공교육을 하향이라고 전제하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기업과 교육에서 엘리트론을 주창하는 근거 중에 엄중한 국제 경쟁 사회에서 생존과 우위에 서기 위한 우리나라, 우리 사회의 불가피한 선택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세계를 생존을 위한 끝없는 경쟁 사회로 인식하는 것부터가 편향되어 있다고 할 수 있고, 경쟁으로 점철된 사회인식은 협력과 공존이라는 가치를 전혀 반영하지 못한다.
우리나라가 몇몇의 뛰어난 인재가 사회를 풍요롭게 하고 먹여 살리는 사회인가? 엘리트가 없으면 정체하고 낙오하는 사회인가? 모두가 땀 흘려 이룬 사회에서 몇몇이 그 과실을 특정인의 기여 탓이냥 포장하고 특정 계층이 특권을 누리는 것을 정당화하고 부와 권력의 대부분을 가로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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