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과 빅토르 안(안현수)을 통해서 본 내셔널리즘-Nationalism
-2014년 2월 11일
2014년에는 2월 7일 개회한 소치 동계 올림픽이 열기를 더해가고 6월에는 월드컵, 그리고 가을에는 인천 아시안 게임 등이 개최 예정이다. 근래 올림픽 등의 국제 스포츠 제전이나 각종의 스포츠가 순수한 아마추어 정신에서 많이 변질되어 있음을 느끼게 된다. 그 탓에 올해에는 국제적인 스포츠 행사에서 내셔널리즘(국가주의)의 열풍이 어느 때보다 드세게 우리 사회에 불어닥칠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내셔널리즘이 근대에서 현대까지 발전 배경과 현재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감당하고 있을까?
내셔널리즘(Nationalism)은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 것으로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국가주의/민족주의/국민주의 등의 다의적인 측면을 가지며, 특정 상황에서는 한두 가지 요소만 나타나거나 세 가지 요소가 모두
나타나기도 한다. 또한 21세기 이후 고도성장형 내셔널리즘이나 (개별) 불안형 내셔널리즘 등으로 세분/구체화되어 파생된 개념을
만들기도 한다. 내셔널리즘의 정의에 대해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정치/사회적(사회과학) 내셔널리즘
민족적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사상적 경향과 태도의 체계이다. 민족적인 가치란 토지, 영토 등의 물적인 기준 및 공유하는 역사 등의 문화적인 기준 등을 가리킨다. 이질적인 문화와 접하면 인간은 언어나 종교, 풍속 등의 문화적인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되는데 종종 이러한 정체성이 타자로부터 강요되거나 부추겨지는 경우가 있다. 그것이 특히 그 집단의 어떤 사회적인 목표가 있는 경우 정치 지도자의 주도에 의해 실행되는 경우가 있다. 그 결과 그 집단에 속하는 몇 만이라는 단위의 사람들이 자신과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들과의 일체감을 갖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의 대중운동을 형성한다. 이러한 경우 그들의 귀속의식을 '내셔널리즘'이라고 한다. 이러한 인식은 무리와의 일체적인 감정임과 동시에 다른 집단에 대한 대립과 배척의 감정도 포함되어 있는 경우가 있다.
원래 내셔널리즘은 프랑스혁명에서 발생한 서유럽적인 사상의 경향으로 본래는 왕, 절대군주에 대한 충성을 개인의 주권을 주장하는 국가로 전환하고자 하는 좌익적인 것이었다. 그리고 19세기의 유럽에서는 내셔널리즘이 많은 혁명운동의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19세기 말이 되자 그것이 우익적인 색채를 띠게 되어 내셔널리즘은 근대적인 정치형태(국가, 공화제, 즉 대표제)와 전통, 역사, 토지, 영토, 혈통 등의 민족적 공동체와의 관련을 강조하는 전체주의적인 것이 되었다. -중략- 서유럽형의 내셔널리즘은 민족, 국민국가의 성립 과정에서 발생한 정치적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지만 동유럽이나 아프리카의 내셔널리즘은 서유럽형의 내셔널리즘과 그 연장으로서의 제국주의에 접하여 그것에 대한 동조 또는 반발로서 나타난 문화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서유럽형의 내셔널리즘은 대중의 국내ㆍ국제 정치의 참여를 촉구하고 국민주권의 국가를 단위로 하는 국제정치의 체계를 낳았다. 한편, 비서유럽형의 내셔널리즘은 각 국민의 독자성을 강조하여 민족의식을 통합시키는 힘을 부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내셔널리즘 [nationalism] (21세기 정치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 스포츠 내셔널리즘
민 족주의•국민주의•국가주의 등으로 번역되어 각각 다소의 의미 차이는 있으나 굳이 말하자면 자기가 속한 국가•국민•민족을 구별하여 의식하며, 그 통일•독립•발전을 강력히 추진시키고자 하는 사상 내지는 운동이다. 근대 올림픽은 교육의 일환으로서 국가적인 체육•스포츠의 진흥책을 실시할 필요를 각국 정부 당국에 인식시키는 것을 목표로 개최된 것이다. 대회의 유치자는 국가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개최 도시이다. 국가 간의 대항 경기로서가 아니고 개인이 경쟁하는 대회로서 기도된 것으로 공식적인 국가별 득점은 채점도, 발표도 되지 않는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올림픽 대회의 엄청나게 큰 선전 효과에 착안, 스포츠의 승리를 그대로 한 나라의 정치•사회 체제의 우수성을 나타내거나 국제 사회에서의 지위 향상의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향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내셔널리즘은 스포츠에 정치적 성격을 갖도록 하기에 이르렀다.
[네이버 지식백과] 내셔널리즘 [Nationalism] (체육학대사전, 2000.2.25, 민중서관)
현대에서 내셔널리즘이 더 굳건한 지위를 누리게 된 것은 개인으로서 보다 집단으로 일정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 더욱 용이하기 때문이다. 서유럽의 국가주의는 EU를 통하여 일대 전환기를 맞았고 이것은 그들의 역사적 공통점과 경제적 요구에 의한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전 세계는 국가주의가 더 강화/심화되고 경제의 침체와 관련하여 극단적인 형태로 표출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외국인 노동자의 배척을 요구하는 배타적인 내셔널리즘의 대두이다.
국가주의는 상업적인 미디어와 정부의 정치/경제적 목적과 결합하여 스포츠에서 '정치적 내셔널리즘'이 맹위를 떨치고 있다. 올림픽 등의 메달 수를 집계하여 국가별로 순위를 만들고 이러한 순위 자체를 정치/사회 체제의 우수성으로 직결 시킨다. 단일 스포츠로 가장 큰 행사 중 하나인 월드컵에서 축구가 국가 대항전으로 치러지고 이 순위는 사회/경제적, 정치적인 엄청난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세계 각국은 이러한 스포츠의 역할에 주목하여 스포츠 진흥에 그치지 않고 총력을 기울인 지원을 아끼지 않게 되었다. 국제 경기의 유치를 위하여 개최 도시의 범위를 초월하여 국가 전체의 역량을 집중하기도 하며, 경기장 뿐만 아니라 사회간접자본의 대대적인 확충을 도모한다. 또한 국가별 경쟁에서 이기기 위하여 엘리트 스포츠 선수 육성을 위한 상비군 제도 및 각종 직/간접적인 지원을 쏟아붓는다. 이는 개인이 자신의 기량을 겨루는 아마추어리즘에서 국가를 대표하여 육성된 선수. 즉, 개별 국가주의의 전사(우리 대표 팀을 흔히 태극전사라 지칭하듯이)가 된 것이다. 물론 이면에 정치적, 경제적/상업적 이권이 복잡하게 뒤엉켜 있다.
이러한 현실에서 볼 때, 빅토르 안(안현수 - 대회 기간이므로 빅토르 안으로 지칭한다)의 경우는 이채롭다. 그는 쇼트트랙에서 태극전사로 육성된 대한민국의 엘리트 스포츠 선수였다. 물론 개인의 노력을 기반으로 이루어졌지만, 엘리트 스포츠 선수 육성을 위한 국가/사회적 지원(형태는 협회의 지원이나 기업의 스폰서 등으로 나타날 수도 있으며 국가의 직접적인 지원은 아니라 할지라도 광의의 범위에서 사회적 지원/육성에 해당) 또한 부정할 수는 없다. 빙상협회의 파벌 문제 등으로 인한 그의 고충과 고통은 논외로 하더라도 빅토르 안의 러시아 국적 선택과 러시아 선수로 올림픽 참가 결정. 그리고 이에 대한 호의적인 일반 국민의 여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재까지의 대부분의 여론은 빅토르 안의 스케이트 선수로서의 결정을 옹호하고 있으며 개인적 차이는 있겠지만 우리나라 대표 선수에 준하는 수준에서 그를 응원하고 있다.
개인의 희망이나 자신의 삶의 목표, 추구하는 가치가 국가주의와 충돌 또는 서로 갈등의 상태일 때 개인으로서 우리는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그 결정을 우리 사회는 또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 물음에 빅토르 안의 사례는 우리 사회의 스포츠 내셔널리즘에서 유연화되고 진일보된 시각을 가져오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추성훈(아키야마 요시히로)의 유사한 사례로 한국 국적의 포기와 타 국적 취득한 전례에 의해 경험된 바도 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의 궁극적 존재 목적이 구성원 개개인의 행복 추구와 그 권익의 보호에 있다는 전제하에서 이러한 구성원 개인의 행복 추구 및 삶의 목적 달성을 위한 행위는 당위성을 가지고 용인된다. 하지만 전체주의 또는 극단적인 내셔널리즘의 입장에서는 어떤 경우에도 국적 포기 행위는 일종의 배신/변절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빅토르 안의 결정은 올림픽 참가와 쇼트트랙 빙상 선수로서의 자신의 꿈과 행복 추구를 위한 행위로서 여론의 공감을 얻었고, 우리 사회는 이를 이제 용인하는 수준을 넘어서 이해하고 적극 응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마련하였다. 단순히 사회적 의무를 면피하기 위한 국적 포기(병역 문제 등에 있어서 유승준 사건이 좋은 예가 될듯하다) 등과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고, 부상 후 재기하는 과정에서의 어려움과 빙상협회의 내부적 파벌 불화 등이 이러한 여론의 흐름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진일보한 시민 의식이 개인을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띤" 존재가 아니라 천부적인 인권과 개인 행복 추구의 궁극적 가치를 지니는 존재로 인정하고, 극단적인 국가주의의 구성원이나 전체주의적 사회의 부품처럼 취급받는 부당과 위험을 제거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이는 다면적인 열린 시민 사회, 서로의 다양성과 개성과 각자의 추구하는 가치가 다름을 인정하는 사회로 발전하는 것에 일조 하리라 생각한다. 하리수나 홍석천이 트랜스젠더나 동성애자 등 성 소수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반감을 상당 부분 희석 시키고 이들의 인권과 처우에 대한 여러 가지 사회적 논의의 기회를 불러왔듯이 말이다. 이러한 시도를 좀 더 확대한다면 소수자 인권과 뿐만 아니라 국민 개개인의 권익의 재논의로 확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개인의 인권과 국가나 국가주의의 추구하는 바가 서로 달라 양립/공존 할 수 없을 때, 그간 우리는 개인의 인권의 일방적 희생이나 순응을 요구받았고 이를 감내하며 살아왔다. 현시점에서 빅토르 안의 사례가 국가 구성원으로서의 개인의 권리와 국가의 존재 이유, 그리고 내셔널리즘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는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
'국가를 위해 국민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국가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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