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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를 기울이면/잉여 Record

<청춘세대 담론> 대학 개혁의 방향

[청춘세대 담론5] 대학 개혁의 방향과 청춘세대 각성의 필요성.

2014.01.26. 01:48


이번 포스팅은 좀 짧게 쓸 수 있기를 바라며 얼떨결에 시작한 연작 포스팅의 마지막 글 이다. 본의 아니게 연작의 잉여짓을 아름답게 마무리하고 싶지만, 짧은 지식과 좁은 견해로 이 또한 쉬운 일은 아닌듯하다.

 

이전 연작 포스팅의 주요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면,

의무 공교육 이수한 자격으로도 취업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를 보급하여 고졸 취업을 활성화 ▶ 고졸 취업의 활성화를 통한 대학 진학률에 대한 조정을 도모하여 현 80% 수준에서 이를 점진으로 낮추어 40~50%대를 유지(반값 등록금 등 고등교육 부담을 줄이기 위한 재정의 규모 축소) ▶ 대학 구조조정 및 구조개혁(부실대학 정리 및 적립금의 활용, 국/공립대의 확대, 정부 주도형 사립대 정책 등)과 반값 등록금의 실현(재정 마련은 교육 관련 증세 세출에서 교육재정부담금과 기업 기여금 확대) ▶ 궁극적 고등교육 비용의 공공 부담이다. 반드시 단계별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며 동시 또는 부분적으로 진행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자세한 내용은 연작 시리즈물의 전작들을 참조하자.

 

 

학령인구 감소 반영, 수도권 국, 공, 사립대도 일률적 반영. 경향신문 2014.01.09


 

 

 현 시점에 당장 반값 등록금을 실현하는데 연간 사립대에 6조 국/공립대에 9천여 억 원 정도의 예산이 필요하고, 학령인구 감소와 대학 진학률을 40%로 조정한다면, 3조 대의 재정 부담으로 반값 등록금이 수년 내 실현될 수 있다. 재단 적립금을 활용하고 또한 사립대 재단의 재산 불리기를 막아 그 자금을 다시 등록금 인하에 반영되도록 한다면 5조 안팎의 예산으로 민간(가계)의 부담 없이 전액 무상의 대학교육도 가능하리라 믿는다.(공짜라느니 공짜의 함정 따위의 주장에 현혹되지 말자. 대학 등록금 무상이 공짜를 의미하지 않는다. 대학에 다니는 기간은 정상적인 소득활동에 참여 기회를 잃는 것이며-의무 공교육을 이수하고도 일할 수 있는 양질의 일자리가 확보된 상태라면 더욱 그러하다- 등록금 무상을 위한 재원 또한 우리가 납부한 세금이다. 소득이 없어 세금 한 푼 낸 적 없다는 말은 하지 말자. 물건을 사고 서비스를 이용할 때마다 세금을 내고 있다.)

 

 

 고등교육비용의 부담을 국가가 모두 부담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단순히 국민의 교육권을 보장해주는 차원일까? 일부 편향적 자유 경제론자(신자유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공짜의 함정'일까?

 

고등교육 비용의 정부 재정 부담은 적절한 시스템을 통해 사회적/경제적 투자로 전환된다.

 

 회/경제적 통찰력을 발휘해 보자. 미국의 엄청난 국방비 예산과 우주개발?(NASA) 예산을 표면상 보이는 것과 달리 다른 시각에서 한번 살펴보자. 미국의 양심으로 불리는 '놈 촘스키' 교수에 의해 일관되게 주장된 바와 같이 미국의 엄청난 국방비 예산은 미국이 군사적으로 세계 최강대국 지위를 유지하게 하고 이를 통해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는 방식을 취한다. 미 국방예산의 대부분은  무기의 개발과 생산, 군사력 유지비용 등에 쓰임과 동시에 '펜타곤 시스템'으로 불리는 방법에 의해 수많은 연구개발에 지원된다. 이러한 연구개발비는 각종 무기의 개발뿐만 아니라 미국 기업의 신기술, 하이테크 기술로 발현된다. 우주개발 예산 또한 NASA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것이며, 단순히 우주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로켓을 개발하고 우주로 향하는 것은 아니다. 그 막대한 연구개발비를 부담하는 미국 정부의 이면 목적은 그것으로 인해 개발되는 신기술들이 미국 기업의 기술 경쟁력으로 이전 또는 전환되는 것이며, 이는 정부가 자국의 기업에 막대한 간접적 지원 방법 중 하나이다.(미국 방산산업의 첨단 무기뿐만 아니라 현재 우리가 쓰고 있는 인터넷 또한 펜타곤 시스템에 의해 개발된 산물이며, IBM, 보잉 항공기의 기술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물론 정부가 직접 기업에 엄청난 연구개발비를  지원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겠지만, 이것은 각종 국제무역협정(GATT 등)과 국제무역기구(WTO)에서 '민간기업에 대한 정부의 불공정한 지원 행위'로 금하는 것이다. 이처럼 정부의 재정지출이 다른 한편으론 기업 및 경제 전반에 효과적인 투자와 지원으로 작용할 수 있다.

 

 독일의 경우는 어떨까? 독일의 대학 교육 제도는 우리가 배울 점이 많다. 독일의 기술력은 어디에서 나오며 독일 기업의 경쟁력의 근원이 무엇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리나라도 장기적 경제 계획에 따라 정부의 재정을 효율적으로 사용하여야 한다. 교육에 투자하는 것이 장기적 안목에서 우리의 기업 및 사회 전반에 경쟁력을 높이는 원인이 되고 기초과학 기술/신기술/새로운 산업 분야의 기술이 우리의 새로운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등교육(대학교육)에 정부가 적극 지원하는 것이 포퓰리즘식 퍼주기나 낭비 또는 공짜가 아니지만, 그 비용이 선순환 되기 위한 선결조건으로 대학 교육에서 개선되어야 할 부분 또한 존재한다.

 

첫째, 연구 중심 본연의 대학의 모습을 회복하는 것이다. 아니 우리는 한 번도 연구 중심의 본연의 대학 모습을 갖추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취업에 유리한 스펙이나 어디 출신이라는 간판을 갖추기 위하였거나, 학연으로 끈끈한 연대와 유대를 다지고자 대학을 선택하였는 지도 모른다. 이런 헛된 욕망에 사로잡힌 우리에게 대학은 비싼 등록금과 등가교환할 수 있는 졸업장 장사를 하였고, 결국 대학과 우리는 진리를 추구하는 상아탑과 진리를 추구하는 자에서 직업훈련소와 취업 준비생 수준으로 전락하였다.


둘째, 대학교육의 내실을 기하여야 한다. 등록금을 내고 별다른 하자가 없으면 당연히 졸업을 시켜주는 성의 없는 교육과정은 대학과 학생 모두를 위해서라도 지양되어야 한다. 대학의 졸업은 곧 일정 수준의 능력을 갖추었음을 대학과 학교 스스로가 증명/보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 교육이 형식적에서 실질적으로 바뀌어야 하며, 이는 학업과 연구에 노력하지 않으면 졸업하기가 어려워 짐을 의미한다.

 

셋째, 대학 전공의 교육 강화 또한 필요하며 전공 교육의 전반적인 질적 수준 향상이 필요하다. 


* 현 재의 대학 교양 강좌는 대대적인 개편 또는 폐강이 고려되는 것이 옳지 않을까? 그것이 교양인지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교양이라는 모양새를 하고 지식인의 수준 운운하며 강요하는 것이 못마땅하고 교양이 다양성을 더 용납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특히 정보 과잉의 시대에 살고 있는 세대에게 지금의 교양강좌는 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대학에서 포크? 댄스를 배운다면 화가 치민다. 정히 교양강좌가 필요하다면 다양한 문화 관련 기관이나 백화점 고객센터 등에서 하는 교양강좌의 수강 기회도 많다. 단, 학생들이 공감/참여할 수 있는 양질의 강좌는 교양/전공을 불문하고 환영한다.

 

 

 대학 서열화 문제 또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줄 세우기는 어렸을 때부터 교육이란 핑계로 행하여 진다. 그 탓에 대학까지 줄을 세우고 서열을 먹인다. 이는 누가 강제로 서열을 먹인 것도 아니지만, 객관적인 평가 기준 또한 모호하다, 그럼에도  우리가 수긍하며(또는 묵인하며) 만든 서열이라서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우수한 교수진이 있는 학교가 좋은 것일까? 우수한 학생이 있는 학교가 좋은 것일까?  연구 중심의 대학?  교육이 내실 있는 대학? 답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모든 것을 갖추면 그게 가장 좋은 학교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서열화 논리에는 우리의 뿌리 깊은 '승자 독식의 논리'가 함께 담겨 있는 듯하다. 대학 교육이 내실화를 이루고 연구 중심으로 정상화된다면 함께 해결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자신의 능력에 맞는 학교가 좋은 학교로 인식될 날이 올 것이며, 출신 대학의 서열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과 능력 그리고 연구의 성과에 따라 평가받을 수 있는 세상을 기대해 본다.  

 

 

 사람은 누구나 반성하고 뉘우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반성과 회고를 가로막는 것은 자신이 뭘 잘 못했는지 잘 못하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인지하지 못함으로 여러 문제를 방치하고 해결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문제 해결의 방법을 알고서도 방치하거나 방해하는 행태에는 모종의 조치가 있어야 한다.  현재의 우리나라 위정자들과 부유층 특히 재벌로 대변되는 대기업의 경영층은 그들 자신의 논리와 생각에 함몰하여 스스로 애국자로 자위하고 얼굴에 금칠을 하고 있다. 그들의 독선과 맹신의 구태에서 벗어나 자성과 각성을 구한다. 스스로 바뀌지 않는다면 강제 당하는 수모?를 겪을 수 밖에 없다.

 

 

 끝으로 청춘 세대의 인식의 변화를 요구하고 싶다. "우는 아이 젖 준다"라는 속담과 같이 자신들의 부당한 처지와 어려움의 공론화와 합리적인 해결을 위해 사회를 향해 충분하게 표해야 한다. 현재 청춘 세대는 말이 없고, 요구도 없고, 속을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각자의 고통이나 불안정한 상황은 계속 제기되어 왔고, 지금도 제기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잘 들리지 않는다.

그 원인은 주류 언론의 사회문제에 대한 인식에서 중요도가 후순위에 밀려 있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청년세대 스스로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단체나 집단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 점이다. 이는 청년세대의 불만이나 요구가 파편화되어 결과적으로 개인의 푸념이나 루저의 불만으로 취급된다. 또 하나는 사회 전반에 만연한 소통 단절의 문제이다. 사실 단절의 심각성은 세대 간, 집단 간, 정치적 관계, 조직의 상하관계 등에 포커스가 맞춰진 듯하다. 그러나 청년세대 내부의 소통도 과연 원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이는 먼저 언급한 두 원인의 시발점이 되는 요인이다. 먼저 청춘 세대 내부에서 소통하자. 이를 통해 스스로의 처지를 공감하고 현실을 직시하고 어떤 요구를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지 고민해보자. 청춘 세대의 각성은 멀리 있지 않다. '안녕하십니까' 자보 현상으로만 보아도 그들은 지성으로 그들의 각성을 시작하는 총명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집결하여 하나의 큰 외침과 사회 전체로의 울림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현 사회에서 개개인이 사회에 대하여 혼자의 힘으로 원하는 바를 쟁취하는 것은 너무도 어렵다. 소통을 통하여 공감대를 형성하고 청춘 세대의 집단 지성을 구현하자. 청춘 세대의 집단 지성은 순수하고 다른 구태의 욕망에 물들지 않는 원초적 힘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청년세대의 진정한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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