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 얄팍한 상식 수준에서 다루는 비전문적이고 깊이 없는 포스팅이므로 숨겨져 있을 오류와 논리적 비약, 수다쟁이의 헛된 망상에 주의가 필요하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 정당들에서는 후보 선출을 위해 분주하고, 이에 관한 정치 뉴스로 산만한 가을을 보내고 있다. 이런 정치 일정이나 수권을 위한 행위와 관련해서 '권력'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심하게 되고, 사진 권력 또는 사진의 힘에 대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념이 길어진다. 가을이니 청명해진 하늘만큼 생각도 넓어지기도 하고, 때로는 그 하늘에 떠 있는 구름처럼 좀처럼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사실, 고민해도 잘 모르겠다.
사진과 관련한 잡생각에서 최근의 개인적인 화두는 디지털 이미징에서 사진의 사회적 역할, 기능과 "오늘날 왜 우리의 사진은 감성 일색이 되었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두 가지 물음 (사실,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때문에 서로 다르지 않은)으로 수다를 시작해 보자.
"사진과 권력 - 사진은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아직도 가지고 있을까?"
"디지털 시대 사진의 화두는 감성 일색이 되었을까?"
▶ 사진과 권력
'권력'의 일반적인 정의는 "타인에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힘"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힘'이라는 말을 너무 딱딱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을 듯하다. 가능성이나 유용성, 효용 등으로 대체해도 그 의미가 그리 달라지지 않는다.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 권력이란 '사회관계 내에서 자기 의사를 대립적 의사에 대하여 관철시키는 모든 가능성'"이라 정의했다.
사진을 통해 시각적 정보를 제공하고 맥락이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이를 통해 사람/대중을 설득하거나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힘(가능성)으로서 사진 권력(효용)은 충분히 수긍할만하다. 때때로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속담처럼 한 장의 사진이 보여주는 시각적인 정보가 그 어느 것보다 강력한 메시지/의미의 전달이 되거나 이를 보는 이의 이성적 자각 이나 감정적 변화를 불러일으키는데 탁월한 역할을 보인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진을 통한 메시지의 전달은 이를 보는 사람의 경험이나 지식 등등 각자의 주관적인 이해나 해석/판단에 의해 다양하게 인식될 여지가 크고, 따라서 의도한 메시지 전달이나 이를 통한 의사의 관철이라는 수단의 측면에서만 보면 이 자체로 변수가 많고 불완전한 수단인 측면도 있다. 이런 메시지 전달/ 의도한 의사의 관철 측면의 결점을 보완하기 위해 언론의 기사나 뉴스/논평이 함께 하거나 또는 주장(말)의 신빙성을 높이기 위해 시각적 증빙으로써 사진의 역할이 강조되고, 이를 효과적으로 구현/기능한 것이 "포토 저널리즘"이라 생각한다.
'사진'의 사전적 정의
"물리학적으로 사진(寫真 또는 光畵, Photograph)은 물체에서 반사된 빛과 같은 전자기적 발광을 감광성 기록재료 위에 기록하여 얻은 빛 그림, 즉 광화상"이라고 하겠지만, 사회에서의 역할이란 관점에서 사진의 기능을 정의하자면, "이미지를 중심으로 정보의 기록과 전달"
사진의 역사적 흐름에서 20세기는 초반의 다큐멘터리 사진의 흐름과 1930년 이후 점차 그 입지를 공고히 했던, 사실주의 사진이 저널리즘과 결합하여 언론 매체나 매거진 중심의 사진 저널리즘(르포르타주 사진)으로 불리는 사회적 역할/기능에 충실했던 시기라고 생각한다. 이 시기는 필름 사진의 사실 증빙과 맞물리고, 정보를 얻는 것에 제한이 많았던 일반 시민의 알 권리와 지적 탐구의 욕망을 채워주는 동시에 각종 사회적 문제에 의사를 주도하거나 형성하는데 필요한 정보로서 (이런 정보를 만들고 제공하는) 사진 권력은 실재했고 사회의 기능적 측면에서도 유용성을 인정받은 시기라고 생각한다.
한 걸음 더 들어가서, "맥락이 있는 시각적 이미지(사진)를 통한 정제된 메시지의 전달"이 사진 권력(타자에게 의사를 관철할 수 있는 힘이나 가능성)을 이루는 핵심 요체가 아닐까. 사진 즉, 시각적 정보로써 이미지 한장으로 맥락을 만들거나 메시지를 함축적으로 내포하기 위해서는 사진 자체의 높은 완성도를 필요로 한다. 역사적으로 한 장으로 세상을 바꾼 강렬한 메시지를 형성한 사진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런 사진이 흔하지 않음은 당연하다. 따라서 이미지가 의도된 맥락/의미/메시지 전달에 있어서의 불완전함이나 곤란함을 우회적인 방법으로 보완하는 것으로 연작의 사진물, 또는 기획 사진전, 사진집의 출판 등도 주요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글(뉴스)과 함께 지면에 제공되는 시각적 이미지/정보의 결합이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 되었음은 의심하기 어렵다.
▶ 21세기, 신문과 잡지 등 레거시 언론과 저널리즘의 위기 그리고 사진
제 4의 권력으로 불린 언론 권력은 사진과 결합한 저널리즘, 르포르타주의 성공이 20세기에서의 주요한 요인 중 하나라 생각한다. 저널/르포르타주 사진은 언론 권력과 공생 관계에 있는, 즉,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처럼도 여겨진다. 독자를 설득하기 위한 사실의 증빙, 그리고 이런 보도를 통해 전달된 메시지를 통해 이성적 각성의 도구로써 작용하고 있었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보도 사진은 언론 권력의 보조자로서의 권력에 불과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에 반해 21세기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언론 권력의 일부 내지는 공생하던 사진 권력(포토 저널리즘이나 르포르타주 사진)은 레거시 언론 권력의 위기에 휩쓸려 사진의 사회적 기능 ("타인에게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는 힘 또는 가능성) 자체도 위협받고 축소된 모양새다. 제한된 정보의 세계에서 새로운 소식(뉴스 또는 정보)을 선점 또는 독점함으로써 권력 (일반 시민들을 설득하거나 특정한 여론이 형성되도록 유도할 수 있는 힘)을 향유했던 전통의 언론과 보도(저널) 사진은 인터넷, IT, 디지털 기술로 대표되는 21세기 사회에서는 넘쳐나는 (때로는 진위 여부와는 관계없는) 무수한 정보, 그 홍수 속에서 뚜렷한 사회적 기능이나 힘을 찾기 어렵고, 거대한 정보의 바다를 떠다니는 무수한 부유물 중의 하나로 전락했다고 생각한다.
사진 특히 보도/저널, 르포르타주 또는 다큐멘터리 사진의 위기를 강화된 초상권 등으로 인한 제약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영향이 전혀 없었다고 부정하지는 않지만, 결정적인 요인이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므로 이에 동의하기 어렵다.
포토 저널리즘의 몰락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변화의 흐름으로 신문 지면이나 매거진의 일면을 장식하던 르포르타주 또는 다큐멘터리 사진이, 점차 개인 또는 전시회로 그 장을 이동하였고, 이는 곧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장르 사진에서 점차 미학 (예술) 장르의 사진으로 변모하였음을 보여준다.
사실, 저널 사진이 항상 밝은 부분만 있었던 것 또한 아니고 그 어두운 면(역기능)에 의한 비판 또한 20세기 당시에도 주목받았다.
"사진은 절반의 진실만을 말한다" - 에디 아담스
그 사진에서 두 사람이 사망했습니다: 총알을 받은 사람과 Nguyen Ngoc Loan 장군. 장군은 베트콩을 죽였습니다. 나는 내 카메라로 장군을 죽였다. 스틸 사진은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을 믿습니다. 그러나 사진은 조작 없이도 거짓말을 합니다. 그것들은 반쪽짜리 진실일 뿐입니다. Two people died in that photograph: the recipient of the bullet and General Nguyen Ngoc Loan. The general killed the Viet Cong; I killed the general with my camera. Still photographs are the most powerful weapons in the world. People believe them; but photographs do lie, even without manipulation. They are only half-truths.
▶ 사진 권력의 위기와 디지털 이미징 이후의 변화
1/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며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저널리즘과 사진 전문가 집단이 주도했던 '포토 저널리즘'은 일반적인 사진 전반에도 영향을 미쳐서 '생활 사실주의' 등으로 불리면 사회적 역할에 충실한 큰 흐름을 만들었다. 그 외 작가주의나 실험주의 등 작가 주관적 관점에서의 경향 또한 존재했지만, 이 시대의 사진계의 큰 줄기는 세계 대전과 월남전, 냉정 이후의 지역적 분쟁 등을 거치며 라이프지나 퓰리처상으로 대변되는 저널 사진의 시대라고 생각한다. 역설적이게도 사진의 2차 대중화를 더욱 촉발하게 한 (필름 자체가 아마추어가 능숙히 다루는 것은 꽤 어려웠지만, 디지털 이미징의 사진에서는 그 어려움마저 거의 사라져서 진정한 사진 대중화의 시대가 되었다) 디지털 사진에서는 20세기를 관통하던 사회적 기능 측면에서의 사진보다는 사회 관계망 서비스(SNS) 등을 통해 일종의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유희로 변모한다. 이는 특정한 메시지나 사회적 역할에 구속되지 않을 일반 대중 일상의 사진, 순수 파인 아트 사진, 또는 주관적/사적 다큐멘터리 사진, 그리고 패션 화보 등의 상업 사진, SNS 중심의 스냅사진, 상업 목적의 스톡 사진 등 다분화 모습을 보인다.
디지털 기술은 원본과 복사본의 차이가 없고, 이를 사후 원하는 형태로 다시 재가공할 수 있는 편의성에 큰 장점을 가지고 있다. 이런 특징은 디지털 사진에서도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는데, 필름 사진이 가졌던 사실을 증빙하는 힘이 디지털 기술의 사후 가공(포스터 프로덕션)의 장점으로 인해 현격하게 약화되었고, 그 외의 가공을 통해 얻는 다양한 시각적 표현이 가능한 새로운 기능에 주목하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눈에 띄는 변화는 사진의 사회적 역할의 무게 중심이 필름 사진 시대에는 사회 전반의 공적인 역할(물론 사적 영역 또한 분명히 존재했지만, 상대적인 비교 측면)에서 이루어지던 것이 디지털 기술과 결합한 이후에는 개개인의 '감성'이란 표현으로 상징되는 '주관적 미학/예술/유희의 역할'로 서서히(때로는 매우 빠르게) 변모해 왔다고 생각한다.
20세기의 필름이나 아날로그 화상 기술을 지나 21세기 디지털 이미지 기술로 전환된 후 사진과 영상의 외적/시각적/비주얼 트렌드(유행)나 화두는 "감성" 또는 "감성적인 표현"에 있는 것 같다. (사진이 사회적/정치적 역할에서 멀어지면서 감성적이 되었는지, 감성적이 되면서 권력에서 멀어진 것인지 그 선후 문제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결과적으로 정보가 넘쳐나는 디지털 시대의 사진은 그 자체에 내재된 (정치적) 메시지는 힘을 읽었고 외형만 남는다. 이는 사진에서 맥락과 메시지를 읽고 이성적 고찰을 위한 정보 전달의 도구에서 감성적(반 이성적/무의식적) 반응을 위한 산물(흔히 예술 따위로 불리는)로 변모하였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사진 자체의 사회적 기능의 변모는 기존의 필름 사진에서 가장 주목받았던 기능인 '권력' 측면에서 보면 허망한 몰락이라고 할 수 있지만, 대중적, 예술/유희적 측면에서는 20세기 초반 잠시 주목받다가 저널리즘 사진과 다큐멘터리 사진에 가려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이면(상업적 /자본적 권력)'이 부각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필름 사진 시대를 관통하는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복잡하게) 정의/정리/해설했던 '수잔 손택'이 작금의 디지털 사진 시대를 산다면 그녀의 사진론이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도 사뭇 궁금하다.
물론 '감성'이 주도하는 디지털 사진에 대해 긍정적인 생각만을 가지고 있지는 않아서 "이성적 메시지는 사라지고 이미지의 감각적 비주얼만 남아 공허하고 수많은 이미지 속에 잠재된 자본에 의한 속물성"은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