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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ories about photography and cameras/One more step

사진, 그리고 한 걸음 더. 6 - 이미지의 서사에 대하여. Part 2 (사진의 장르와 서사) /Narrative Photo and Storytelling 2

Notice 얄팍한 상식 수준에서 다루는 비전문적이고 깊이 없는 포스팅이므로 숨겨져 있을 오류와 논리적 비약, 수다쟁이의 헛된 망상에 주의가 필요하다.

 

사진의 역사가 200여 년이나 흘렀고 취미로 사진을 찍어온지 30여 년이 된 지금도 사진이 무엇인지 아리송하다. 사건이나 현상의 기록인 동시에 때로는 조형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시각 예술이고 필름의 시대를 지나 디지털 이미징과 컴퓨터 그래픽 시대의 사진은 그 이전의 실험적 사진에서의 다양한 시도가 무색할 만큼 이미지 요소의 변화와 재조합을 통해 변화무쌍한 사진 만들기가 가능해져서 '사진이란 무엇일까' 정의 내리기 더 헷갈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또 한편으로 이런 변화에 대응해 사진의 본질이 사실성 또는 조형성에 있다거나 심미 추구라는 서로 상충하는 사진론이 내부에서 꿈틀거린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사진의 본질은 단순히 시각적인 요소의 사실성이나 조형의 심미 추구 또는 객관이냐 주관이냐의 논쟁으로만 국한시킬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해서, 스스로에게 "바보야! 좋은 사진의 문제는 조형적 구성(구도나 색감)이 아니라 사진 속의 이야기/ 스토리텔링이야"라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조형적 아름다움과는 구별되는 사진 속의 이야기, '이미지의 서사'에 대해 개인적 망상의 수다를 이어가 보자.

 

 

▶ 사진의 장르와 서사

 

사진을 구성하는 요소로서 '비언어적 서사'는 모든 사진에서 필수 요소라고는 할 수 없지만, 장르나 사진의 시대적 흐름(사조?)에 따라 매우 중요한 요소로 작용할 때도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렵다. 실제의 사건이나 현상을 관찰 기록하는 보도 사진과 다큐멘터리 사진에서 이미지 속의 이야기/서사는 작가의 주제(목적) 의식을 구체화하는 수단인 동시에 이 서사는 조작되지 않은 사실일 때 비로소 본래의 역할이 가능하다. 그리고 이런 조작되지 않았음은 단순히 합성이나 이미지 일부의 변형이 아니란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뒤 맥락과 실체적인 진실에 부합하는 서사라는 믿음/신뢰에 기반하여야 '좋은 사진'이라 할 수 있겠다. 물론 르포르타주 사진 또한 극적인 서사와 묘사, 결정적 순간?에 열광하지만, 이 드라마틱한 순간/찰나의 서사에 대한 일반 대중의 찬사는 사건이나 현상에 대한 조작이나 연출 없이 사진가의 노력과 감각이 빚어낸 사실 그대로의 현장 포착인 동시에 주제 의식과 감각적인 구성/프레임으로 만들어진 드라마틱한 이야기/서사에 대한 것이라 생각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자연 풍경이나 동식물 등 자연 생태를 촬영하여 자연의 모습을 담는 사진에서 이를 감상하는 사람은 그 장면에서의 서사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연출되거나 조작되지 않았다는 믿음을 전제로 하고 측면이 매우 크게 작용하는 것은 아닐까. 몇 해 전 나뭇가지에 날지 못하는 어린 새를 둥지에서 꺼내어 나뭇가지에 매달거나 본드로 붙여 연출한 사진이라는 의혹에 실망하고 분노한 것 또한 연출되지 않은 자연의 모습과 사실의 서사에 대한 믿음을 저버린 것에 기인하지 싶다. (동물학대에 대한 논란은 차지하더라도) 연출된 드라마틱한 상황이라는 것 자체로 기대했던 사실성의 의미는 희석되고, 이를 보고 느끼는 감동이나 감상의 정도 또한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다. 즉, 다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연출된 살롱 사진이라는 실망이 작용하지 싶다. 이는 합성이나 CG(컴퓨터 그래픽)에 의한 경우도 비슷하다.

출처 - http://ecotopia.hani.co.kr/68626

 

일반적인 의미의 상업 사진의 서사는 일정 목적을 위해 이를 보는 독자는 연출에 매우 관대하게 받아들여진다. 물론 사진의 연출이라는 측면에서 컴퓨터 그래픽의 연출 등에 비해 여러 제약이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용인되는 연출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상업 사진의 연출은 사진가 또는 상업적 목적에 부합하는 강력한 서사를 만들 수 있겠다. (상업 사진의 개념 또한 다양한 사조의 영향을 받아 단순화하는 무리수의 난점을 피하기 어렵다. 이는 추후 정리하는 것으로 하자) 스튜디오 사진으로 연출을 위해 최적화된 공간에서 현실을 뛰어넘는 때로는 더 현실적이라 보이는 사진을 촬영하는데 이를 연출이나 조작되어 진정한? 사진으로서 평가할 수 없다는 편협하게 평할 이유는 전혀 없지 싶다. 때때로 연출이 아니라고 착각할 수는 경우도 있겠지만, 연출하였다고 하여도 실제 하는 장면이므로 현실성과 사실성은 어느 정도 담보되지 않을까.   

 

 

▶ 사진 사조와 서사

 

사진의 역사를 되돌아보아도 회화(초상화)를 대신하는 인물 초상으로서의 사진(초기의 회화주의)에서 연출은 불가피한 방식이라 생각된다. 사진 초창기 감광 유제의 낮은 성능 탓에 사진기 앞에서 한동안 정지하여야 제대로 사진을 얻을 수 있었으므로 이 당시의 대부분의 인물 사진은 애초 연출될 수밖에 없는 사진이며 픽토리얼리즘(Pictorealism) 사진에서는 그 속의 서사의 방식은 치밀하게 계산되어 연극의 한 장면처럼 연출되어 보인다. 스트레이트  포토그래피의 등장이나 캔디드 촬영이 가능한 카메라의 등장 이후에야 연출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실제를 담는 사진이 가능했다. 

 

회화주의 사진(살롱 사진)은 회화의 조형적 아름다움 추구라는 측면에서 회화와 유사했고, 때로는 사진을 회화의 아류 정도의 인식을 벗어나지 못했는데, (르포르타주 사진은 회화의 아류 정도로 인식되던 사진을 독립된 예술의 한 장르로 만들었지만, 회화주의 사진의 저변은 매우 견고하고 현재까지도 영향력이 꽤 크다고 생각한다) 회화주의 사진은 회화의 수법을 사진에 적극 도입하며 회화적 구도를 중시하였고, 사진의 서사라는 측면에서 회화와 동시에 작가가 의도한 서사를 조형적 아름다움에 가려 있는 특징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회화주의 사진을 심미 추구에 매몰되어 아무런 서사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회화주의의 서사는 조형미 아래에 살짝 숨겨진, 잘 짜인 각본처럼 구성되고 연출되어 사진의 서사를 은연중에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즉, 회화주의 사진의 서사는 직접적인 메시지의 전달이라기보다는 조형적 아름다움 저변에서 치밀하게 계산된 시각적 징표와 상징의 서사 구조를 가진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르포르타주(보도와 다큐멘터리) 사진의 핵심은 사실에 기반한 사건이나 현상의 '기록과 보고'에 있지만, 서사는 사진의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로 회화주의 사진에 비해 더 직접적으로 작용하다. 실제의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표현하는 사실성에 기반한 사진은 '결정적 순간'에서야 비로소 극적 서사를 가지는 즉, 사진의 서사를 구체적으로 완성하는 것은 치밀한 계산보다는 감각적인 순간 포착에 치중할 수밖에 없지만, 작가의 주제 의식을 전제로 다수의 연작을 통해 보다 잘 드러난다.  

 

그 외 사진을 칭하는 사조?들도 다양하다. 자연주의, 인상주의, 초현실주의, 작가주의 등이 종종 언급되지만, 사실 사진의 서사라는 관점에서 구분의 실익이 있는지 잘 모르겠다. (형식주의 예술론을 기반으로 한다면 서사 등의 내용을 제거하고 형식만으로 미적 가치로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다) 대부분 회화에서 차용한 정의가 많고,(작가주의 등은 영화에서 차용한 것이지 싶다) 더구나 사진의 작가를 이런 사조로 분류하기에는 그리 적절하지 않은 측면이 있는데, 살롱 사진으로 시작해서 다큐멘터리 사진가나 포토 저널리즘의 작가로 활동하거나, 다큐멘터리 사진가에서 다시 회화주의의 순수 예술사진으로 전향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쯤에서 필름 시대를 풍미했던 우리나라의 다큐멘터리 사진사를 잠시 되돌아보는 것도 흥미롭겠다. 여기서 하나 유념할 점은 이는 전문 작가군에서 나타난 특징적인 사조의 경항이지 일반 대중의 사진 전반의 경향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60년대 이후의 필름 카메라 대중화에 의한 다양한 사진이나 2000년 이후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으로 촉발된 변화와는 내용적으로 차이가 있어 보인다) 그리고 이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실에 개인적인 정리 수준이라 그리 신뢰할만 하지 않은 분석이라는 점도 말해두고 싶다. 

 

 

한국전쟁을 겪은 후 1950년대 '생활주의 리얼리즘' '생활주의 사진'이라는 이름으로 집단적 사진 창작이 등장하였고, 이후 이는 신문이나 잡지 등을 통해 '포토 저널리즘'으로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다.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의 서사는 실제의 사실성에 기반한 기록과 르포르타주와 다큐멘터리 사진 그리고 포토저널리즘으로서 사실의 기록과 보도로 대표된다. 기록과 보고를 위한 사실성에 기반을 둔 사진은 때때로 매우 건조하고 삭막한 시선으로 보일 수 있지만, 생활주의 사진의 서사는 사실성에 기반하여 작가의 주제 의식이 절제된 형태로 투영되며 시대나 사회의 문제 등을 기록/보고/고발하면서 사실성과 객관성을 엄정하게 유지한다. 사실성과 객관성 추구의 굴레는 (극적) 서사를 제한하고 있는 측면도 있어 보인다. 대표적 작가로 임응식, 정범태, 이형록 등이 있으니 관련 사진집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임응식 작가

이후, 70~80년대를 거치며 전형적 리얼리즘에 탈피한 (객관적 사실주의를 뛰어넘는) '작가주의(사적 다큐멘터리 사진)' -본래의 작가주의/Atureurism는 작가의 주관적 입장에 집중한 영화 등 다른 예술 장르에서 비롯된 개념이지만,- 사진  즉, 사실성을 기반으로 사진 작가의 독자적이고 주관적인 시각에 주목하여 "작가의 주제의식/메시지와 이미지의 서사를 더욱 강조한 사진이라 생각한다. - 대표 사진가로는 주명덕 작가가 있다. 

주명덕 작가 - '섞여진 이름들'

▶ 작가주의(사적 다큐멘터리) 사진

 

작가주의는 꽤 흥미로운 지점이 있지만 동시에 모호한 점도 꽤 있어 보인다. 다큐멘터리 작가주의 사진은 사실성의 기반이라는 측면에서 생활주의 사진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리얼리티 추구의 객관성에 작가의 (사적) 주관을 강조하는 것에 주목해야 하지 싶다. 모호한 점은 앞서 설명했듯이 작가주의 개념 자체가 "개인 내면의 주제 의식"에 의한 주관적인 것으로 '개별성'에 기반하고 있어서가 아닐까. 좀 더 풀어서 설명하면 작가주의 사진에서 중심이 되는 '작가의 주관성'이라는 개념은 정형화되지 않은 개별성으로 경우에 따라 달라지는 천차만별의 모습이 아닐까? 리얼리즘이라는 사실의 객관성에 기반하는 공고한 사실주의의 리얼리티의 추구도 있고, 때로는 사실성의 바탕으로 작가 주관적 심미의 경향성(영화 등에서는 미장센 등으로 불리던)이 혼재하고 있으니 결과적으로 리얼리즘의 객관성과 작가의 주관성이라는 어울리지 않는 두 요소의 불협화음이 드러나기 쉽고, 따라서 작가주의 사진을 작가라는 개인에 집중하지 않으면 정의하기 쉽지 않으며, 작가의 개별성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요'라고 해야 하지 싶다. 따라서 작가주의는 작가 개인에 따라 천차만별의 모습과 양태로 나타난다. 미학적 고려, 조형적 구성뿐만 아니라 사진의 서사 또한 사회 부조리 고발과 저항, 때로는 극단적인 심미주의 성향 또는 정치적 성향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다. (엄격한 의미에서 리얼리즘은 회화주의에 반대 개념으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이지만, 작가주의 리얼리티 사진에서는 이 둘의 접점이 전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외에도 '작가주의'는 여러 의미로 사용되는데 때로는 상업주의에 대한 반대의 개념(미학적 예술성)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몇 해 전에는 소니의 카메라 광고 카피 문구에 '작가주의'라는 문구가 달린 정도로 일종의 '허영심?'을 부추기는 작가주의적 마케팅으로도 활용되는 예도 있어서 씁쓸하게 다가올 때도 있지만, 작가주의 사진은 지금까지도 사진가들에게 많은 지지를 받고 있지 싶다.

 

이후, 90년대를 전후하여 각종 실험주의 사진이 등장하였지만, 이 시기는 말 그대로 다양한 실험적 시도로 이해할 수 있겠고 (이런 실험적 사진 또한 작가주의의 심화로 볼 수도 있겠다) 실험적 시도가 특정한 큰 흐름이나 주류를 형성하였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2000년을 전후한 디지털 이미징 시대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디지털 이미징이 사진의 주류가 되면서 사진의 사실성과 객관성 그리고 기록과 보고에 기반한 '어떠한 조작이나 변형'을 거부하는 기존의 굳건한 (다큐멘터리 또는 포토 저널리즘 중심) 사진 이론에 균열을 촉발시켰다. 대표적으로 포토/잡지 저널리즘의 대표적 아이콘이었던 라이프 지 등의 폐간이 상징적이고 더불어 다큐멘터리 사진 또한 예전만큼의 영향력을 보여주지 못한다. 그 틈새를 다시 심미적 예술 활동에 중점을 둔 순수 예술사진이나 복고의 회화주의 영향을 받은 사진이 약진하는 흐름 또한 확연하게 체감된다. (포토 저널리즘의 쇠락은 디지털 기술과 통신 기술, 그리고 이미지나 영상을 소비하는 방식의 변화 등 매우 복합적인 측면이 있는데, 이는 다음을 기약하자)

 

사족으로 몇 마디를 덧붙이면, 최근 유튜브 등의 사진 관련 영상을 보면 현직 사진작가 등의 영상이 흥미를 끄는데, 사진작가 입장에서 "사진은 XX다" 정리하는 내용을 흔하게 본 듯하다. 일응 흥미롭고 귀를 솔깃하게 하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사진의 정의나 활동의 범위를 작가 개인의 주관에만 근거하여 편협하게 좁혀서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관성에 방점을 둔 작가주의에 공감하는 바 크지만, 무엇이든 극단의 문제는 있지 않을까. 특히, 아마추어 사진가라면 다양한 사진을 즐기고, 자신에게 추구하는 사진을 찾아가는 과정이고 이 과정에서 자신과 다른 타인의 취향과 선호 그리고 개별성 존중이 작가주의에서 가장 핵심이 아닐까 생각한다. 하지만, 종종 사진을 평가하는 장면 등에서 아쉬운 점이 많은데, 주관에 근거한 기준을 객관적인 사진의 핵심 가치로 일반화해서 말하는 것은 분명히 한계가 있고, 모두가 획일적인 사진관/가치 체계를 가지는 것에 반대하며, 그 작가의 주관적 기준에서 평가절하하거나 저질이라고 지적하는 "잘못 찍은", "실패한", "착한?" "달력?" 사진 또한 그 사진을 촬영한 이가 의도한 주관적 가치, 함의를 모두 알지 못할 것이고, 애초 사진의 가치를 평가할 수 있는 절대적 기준 또한 없으므로 평가자의 주관에 의한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평에 불과하지 않을까. (물론 기술적인 평가 등은 별론으로 하더라도...) 다양성이 사진을 더욱 자유롭고 풍요롭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사진의 본질을 곡해하는 것으로 많은 사진가로부터 경멸의 대상이 되었던 '살롱/회화주의 사진' 또한 디지털 이미징에서 일명 포토샵으로 대변되는 새로운 기술과 결합하여 재등장하고 있고, (재평가 받아야할 필요도 있어 보인다) 다큐멘터리 사진 또한 사실성이라는 본질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 극적 장면의 연출과 결합(심미 추구)하는 다양한 변화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기록성과 사실성의 사진과 회화주의 사진이 사진 예술의 두 수레바퀴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닐까 싶다. (물론 수레가 아니라 바퀴라고 생각하면 하나로도 굴러가는 것이 가능하지겠지만...) 

 

사진과 서사에 대해 이야기하려다 관련 없는 엉뚱한 망상이 더 길어진 것 같다. 디지털 기술 혁명이 사진에 가져다준 변화와 대중의 개인 사진에 나타나는 서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는 느낌이다. 전문 작가들이 주도하던 사진이 디지털 기술(디지털 이미징과 디지털 통신 기술, 그리고 SNS 등 사진의 소비 방법의 변화)로 인해 대중 중심의 사진을 주목해야 하는 변화로 흐름이 변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이에 관해서는 또 다음 수다에서 다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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